Christian Marclay는 1955년생으로 턴테이블리즘turntablism,  임프로비제이션improvisation,  사운드콜라주sound collage등의 대가로서, 현재는 시네믹스 등 사운드, 노이즈, 비디오, 사진 등 전방위적으로 작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그는 Joseph Beuys, Fluxus Movement의 태도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무엇이든 악기가 될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연주가 될 수 있다’라는 그의 태도는 phonoguitar등의 instrument들로 나타났고, 최근에는 기존 매체들의 장르 내부적 특성들간의 이종교배 를 통해 보다 순수한 맥락context이라는 지점을 향해있다.

Christian Marclay의 작업은 언제나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전체성, 혹은 맥락이라는 중첩된 현실의 구조를  전제로 한다. 이번에 Leeum에 전시된 비디오 4중주 시네믹스 작품에서 우선 스크린 속 세계 및 그것이 재생되는 세계, 그리고 그것이 녹음/녹화되는 매체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 구조에서 비디오 및 사운드스케이프는 그것이 재생되는 공간의 사이즈와 신체의 방향성에 의해 원경과 전경으로만 체험된다. 작가는 현실의 중첩된 구조를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 구조 내부에서의 관람객 각각의 체험까지는 프로그래밍하지 못한다.

24hr 러닝타임을 가진 the clock은 영화가 갖는 내부적 속성, 즉 일방향성 혹은 작품의 정해진 러닝타임을 다양한 방향성으로 헤쳐놓았다. (의도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등받이의자 등받이가 없는 의자, 그리고 눕거나 다리를 쭉 뻗고 볼 수 있는 소파는 언제든 보고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 두 작품들에서 신체의 위치와 방향성 그리고 관람시간 등은 일종의 악기처럼 기능한다.

이 전시는 내년 2월 1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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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ster-noton 레이블의 음반 및 인스톨레이션 작업들에서 감명깊었던 부분은 변형transform 혹은 전이transition였다. 그러기에 raster-noton의 작업은 유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한정됨 없이 사운드, 영상, 물질 등 공간space의 모든 영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mutek에서 선보였던 atom과 carsten nicolai라는 작가네임으로 작업했던 aoyama space등의 설치작품들이었는데 이 작품들은 흔히 우리가 이들을 정의하는 audio-visual 작업의 경계를 훨씬 넘어서있다. 작품들의 실체는 어떤 관념속에서만 존재하며, 관객들은 마치 매트릭스라도 경험하는 듯이 중성적인 공간들을 넘나든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들의 작업은 지오메트리geometry를 새롭게 그리는 것일 뿐이고, 그것의 차원수를 얼마나 공간속에서 증가시키느냐가 이들 작품의 관건이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환경 또한 이러한 차원에 영향을 끼칠수 있는데, alva noto의 공연컨셉과 양일 공연이 치러진 LIG아트홀의 공연장구조는 작품을 너무나도 예상가능한 동어반복 차원으로 한정시켜버렸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으나) 이번 공연은 조금 실망스러웠으며, 때문에 영상이 멋있었네 어쩌네 하는 수준의 관람평 밖에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공연에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있었는데 스크린 위로 마우스포인터가 지나다니거나 에러메시지가 뜬 부분이었다. 이 분야 대가의 엄숙함과 함께 가장 아이러니한 관람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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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10943

지난 금요일/토요일 양일간 Aki Onda의 한국에서의 첫번째 퍼포먼스 및 전시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진행되었다.
Aki Onda는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전시, 공연등의 활동을 하고 있으며, Sony의 카세트테잎 포터블 레코더로 녹음한 20여년간의 기억들을 재구성한 작업 Cassette Memories 및 여러 아티스트들과의 콜라보레이션 작업들로 알려져있다. 그 동안 한국에선 음반작업으로만 그의 작업을 접할 수 있었는데,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기획한 퍼포먼스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그의 사운드 및 슬라이드 전시를 직접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언제나 그의 사운드퍼포먼스가 그의 컨셉을 어떤 공간적 배치로서 현실화하며 진행되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번 퍼포먼스에선 조명, 동선, 공간의 볼륨, 사운드들의 배치 등이 모두 고려된 세심함을 느낄 수 있었다. 

Aki Onda에게 기억은 그것을 신체의 일부, 혹은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보는 관점을 넘어서 있다. 기억은 현재를 가능케하며 현재에 구체적인 공간 및 장소성을 부여한다. 기억의 단편들은 신체의 움직임과 방향성, 그리고 시간의 누적에 의해서 다시금 현실의 공간을 형성하면서 섞인다.

Aki Onda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내년 봄 Cassette Memories Vol.3 'South of the border' 가 발매 예정이라고 한다.아티스트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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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Aki Onda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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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tecture as new media

2010.10.03 10:14 from 분류없음

매체와 예술media and art

도널드 저드D.Judd는 그의 저서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s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제작된 가장 훌륭한 신작의 절반 이상이 회화도 조각도 아니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그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들을 열거한다. 로버트 모리스R.Morris는 아트포럼Artforum에 기고한 그의 글 조각에 관한 소고Notes on Sculpture에서 당시의 새로운 미술의 경향에 대해 ‘새로운 삼차원 작품’이라고 언급하였다.


1950년대를 전 후로 회화painting와 조각sculpture이라는 장르간의 경계는 확장되거나 수축되어 그것들 사이의 경계가 매우 불확실하게 되었다. 이후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구조물structure’이나 ‘제안proposal’ 등의 새로운 용어로 언급하며 기존의 명확해보였던 어휘적 구분을 지양하였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에서 기술의 진보가 가져온 예술 표현방식의 지각 변동, 즉, 사진과 영화의 발명과 그것에 뒤이은 논쟁들에서, 구세대적인 문제 의식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것은 표현 방식에 있어서의 ‘매체media’의 속성에 관한 심도있는 최초의 논의였다. 벤야민은 ‘예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라며 당시 새롭게 출현한 미디어의 잠재성의 측면에 주목하였고 이러한 태도는 이후의 미학적 관점이나 예술작품의 경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위에 언급되었듯이 장르간의 무차별한 교차, 범경계성, 불확정성을 전제하는 현대미술은 그 개념적 정의에서부터 모호하고 규정짓기가 까다로워 그것의 ‘권리적’인 위상을 파악하기가 곤란한 지점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현대 예술은 완전히 새로운 생성논리를 요구하는데, 이것은 창작create이라기보다 오히려 배치, 즉, 프로그래밍programming의 방식과 같다. 기존의 고전적이고 고정된 오브제object로부터 해방된 현대 예술은 프로그래밍에 대한 개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 작품이 된다. 이렇듯 현대 예술의 주된 경향은 이러한 공통적인 태도 내지는 생산적 방법론의 공유이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이 분리된 각각의 예술 장르, 즉, 특정 매체들간의 논리적 연관관계나 상호적 영향을 다루는 것은 부적합한 방식이다. 오히려 현대 예술은 매체에 종속되기 보다는 새로운 매체를 발명한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뉴미디어아트, 실험음악, 영화, 건축 등 동시대의 범경계적 예술작업들이 어떤 생성논리를 공유하면서 현실의 구조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그리고 프로그래밍이라는 방법론과 사회체social body들의 변화 역량과의 연계성에 대해 다룰 것이다.



신체와 이미지Image

벤야민은 기술복제의 예술작품에서 이미지image의 ‘복제’라는 기술적 진보가 파생한 예술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질 들뢰즈G.Deleuze는 시네마1:운동-이미지Cinema I : L’Image-Movement에서 ʻ모든 사물은, 즉 모든 이미지는 그것들의 작용과 반작용과 혼동된다. 그것이 보편적 변주 l'universelle variation이다. ... 이 모든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면plan이 된다. 이 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en-soi, 이것이 물질이다.'라고 언급한다. 세계는 원본originality과 중심의 부재속에서 물질-유동성, 운동-이미지의 연쇄에 의해 표현된다. 불안정한 이미지들의 세계는 매순간 새롭게 표현된다. 예술의 표현은 사회체들의 행동, 실천과 동일한 평면 위에서 행해진다. 예술의 생산방식도 이와 나란하다. 예술적 표현은 격리된 시스템들 사이의 논리적 귀결이라기보다는 영화 이미지의 몽타주와 같은 배열 혹은 조합이다. 신체는 닫힌 공간에 의해 한정된다기보다는 미디어 스크린에 의해 새롭게 조합되고 확장된다.


어떻게 고정된 함의를 영속적으로 반복시키는지 여부보다 신체 이미지를 어떻게 매순간 새롭게 배치시키느냐에 따라 매체적 가능성이 발명된다. 사운드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R.Ikeda의 Matrix(5ch version)나 제이슨 칸J.Kahn의 Nach innen nach aussen에서 관람객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서 매순간 다르게 경험되는 사운드를 체험한다. 이것들은 조각도 아니고 음악도 아니다. 이것들은 신체이미지의 새로운 배치이며 그것을 가능하게 제반조건이 바로 뉴미디어이다. 뉴미디어는 이렇게 환영적이라기보다는 현상학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감상한다기보다는 체험한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며, 작품이라기보다는 환경, 즉 신체가 배치되는 환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하게 되었다.


때문에 뉴미디어아트new media art란 유동적인 변화의 관점에서 세계를 몽타주로서 ‘분석’하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미결정되고 비형식화되어있는 기술적 제반조건들을 다이어그램diagram적 생성의 차원으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표현매체는 예술작품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물로서만 나타나며 이러한 프로그래밍의 과정에 의해서 탄생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테크놀로지technology의 발전이 매체예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배양하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관계성과 배치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구현을 가능케한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은 기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며 ‘예술과 테크놀로지가 담지하고 있는 진짜 문제는 어떻게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만들 것인지가 아니라 급격하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 미디어를 어떻게 ‘인간화’할 것인가에 있다’라고 기술이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술의 사이 영역에서 어떠한 새로운 배치, 즉 기계-인간 인터페이스interface가 생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탐구했다. 


이렇게 범경계적 현대예술은 불확정적인 이미지들의 교차가 일어날 수 있는 기술적 인터페이스를 프로그래밍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이고 결과가 불분명한 개요를 그리는 것이다.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작업실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닌, 관람자의 참여에 의해 확장되는 열린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한다. 이것은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삶, 즉 행위 그 자체를 위한 프로그래밍이다. 이러한 프로그래밍은 전시 혹은 감상이라는 일방향적 의미전달체계 보다는 체험과 거주의 접근방식을 요구한다. 일회성은 긍정되었다. 예술은 일상성을 수용했고 작품은 마치 하나의 건축물처럼 기능한다. 프로그래밍, 즉 다이어그램적인 생성논리는 건축만의 내부적 프로세스가 아니라 현대 모든 예술이 공유하는 태도이다. 인간의 행위라는 광범위한 운동을 수용하기 위해 건축은 신체와 이미지들을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새로운 배치를 이끌어내는 인터페이스로서 기능해야 한다.



인터페이스로서의 건축Architecture as an interface

현대 예술의 주된 경향은 지금-여기라는 일회성을 긍정하는 시간적인 예술로서 가시적인 흔적이나 무거운 오브젝트가 보다는 그것이 생성해내는 사이공간, 틈새void space에 가치를 부여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structure 혹은 프로토콜protocol을 위한 프로그래밍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불확정적이고 일회적인 인간의 행위들을 프로그래밍하기 위해서 건축물은 무겁고 닫혀있는 오브제보다는 가볍고 투명한 미디어로서 기능하며 이미지들 사이에 신체를 배치시켜야 한다. 때문에 건물의 모든 표면은 참여를 위한 감각-수용의 표면으로서 기능해야 한다. 감상에서 거주로의 체험 양식의 변화는 설치작품과 건축물의 경계를 없애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공간 자체를 전시하고 그곳에 산다.


탈중심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들의 세계에서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현대예술 및 건축의 프로그래밍은 견고하고 닫힌 틀을 제조하기보다는 가볍고 가변적인 불안정한 일회성의 텍스트를 구성한다. 건축물은 건설, 혹은 공사construction에 의해 지어지기 보다는 설치installation에 의해 지어지는 가변적인 프레임이다. 디테일detail은 보다 간결해야하며 공간의 구획은 보다 연약해야한다.


SANAA(Sejima And Nishizawa And Associates)의 대부분의 작업들에서 건축물의 요소들, 즉 벽, 천장, 바닥 등은 투명한 미디어로서 기능한다. 건축가와 뉴미디어아티스트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공간들은 간결하게 구성되며 투명성에 의해 인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결국 신체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주위 환경을 다르게 체험하는 경험을 갖게 되는데, Stadstheater in Almere의 경우 건물의 외부 마감은 투명도, 불투명도, 반사도에 따른 다양한 패널들로 이루어져 있어 밤과 낮의 서로 다른 표정을 가진다. 이 건축물은 차라리 거대한 디스플레이로, 즉 설치미술이자 뉴미디어 인터페이스로서 도시와 소통한다. 신체는 투명한 벽체라는 미디어에 의해 한정된 공간 내부에서 프로그램의 고정된 내용에 의해 한 방향으로 배치되기 보다는 매순간의 시점에 따라서 인접한 공간 혹은 외부를 재료로 미쟝센mise en scne, 몽타주를 재구성한다.


장르간의 영역 붕괴의 현상은 보다 확장되어 현대에 예술과 건축, 전시와 주거라는 각각의 기능의 구분은 상당 부분 무효화되었다. 우리는 전시장에 주거할 수 있어야 하고 주거 공간은 마치 설치미술의 전시와 같이 구성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건축을 포함한 현대 예술의 모든 경향은 자신의 형식적 영역을 공고히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기보다는 내적인 작업 프로세스 깊숙히 비슷한 방법론들을 공유하고 있다. 건축가는 미디어 아티스트들과 동등한 작가적 위상을 부여받는다. 반대로 미디어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작품을 건축적인 방법으로서 구축한다.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계보화가 가능하지만, 그로부터 비롯되는 빈 공간은 계보화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겹쳐지고 확산될 뿐이다. 모던의 건축언어였던 이분법적인 영역의 구분보다는 투명하고 모호한 경계boundary는 이미지들의 불확실한 세계를 제한없이 퍼지도록, 다양한 혼합과 병치가 가능하도록, 그럼으로써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모든 체계에서 변화의 역량을 끌어낼 수 있다. 현대미술과 건축에 내재한 프로세스상의 이러한 경향은, 모든 선언manifesto이나 슬로건slogan보다 더 효과적으로 정치적인 변화의 역량을 수행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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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city

2010.09.19 10:39 from 분류없음

24 city (2009)
Director _ Jia Zhang Ke


1.언젠가 이 글을 다시 열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현재로서 그럴것이다. 하나하나의 기억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이다.

2.현재는 경이로움으로 매번 경험된다. 그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 간격에서체험되는 것은 의식과 대화방식이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아닐 것이다.

3.롤러스케이트의 원환운동과 기계의 왕복운동, 고가도로 차량들의 무심한 순환운동은 과거의 무게를 그대로 껴안으면서도 눈물나게 아름답도록 그것들을 떨쳐낸다.

4.생성됨과 동시에 무너지고 있는 세계. 내가 디디고 있는 땅, 그것을 직시한다는것.

5.너는 점점 사라지지만 찬란한삶을 나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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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uenrekorder in SEOUL

2010.08.22 13:10 from 분류없음
http://www.gruenrekorder.de/?cat=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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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은 서사를 동력삼아 정해진 시간 동안 영화 속에 공간들간의 극적인 시퀀스를 이어놓은 일종의 롤러코스터와 같은 구조체로 볼 수 있다. 때문에, 영화 속에 재현된 공간은 비현실적인만큼 구체적이어야한다. (여기에 크리스토퍼놀런의 천재성이있다.)
엔딩크레딧은 영화속 장치와 동일한 킥kick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로서 영화적 체험은 급격히 종결된다. 관객들은 한방 맞은 기분으로 영화 속 공간과 불연속적으로 단절되며무의미한 사물로서의 스크린과 현실의 웅성거림이 극장을 가득채운다. 여기서 영화 속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의 전이transition나 소통은 가능하지만 구분은 명확하다. 이 작품은 그 내용적인면 보다 순환이나 전이를 위한 장치라는 영화의 매체적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여기서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는 단절을 전제로 대화가 이뤄지는데,  마무리에서 영화라는 장치가 현실세계와 맺는 그러한 관계의 단면을 극명하게 노출시킨다. 

극영화의 한계와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혹은 극영화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구분이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동과 극영화 스틸라이프를 제작하기 위한 지아장커의 과제였다. 여기서 그의 태도는 장르라는 문법에 종속되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장르를 창조해내었다.
위에 언급된 두 작품은 오히려 영화 이전에 일종의 시선들의 복합체인데, 때문에 카메라는 시선이 머무르는 그곳에 있다. 여기서 이 영화는 인셉션과의 극명한 대척점을 형성하는데 영화 속 세계와 현실 세계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로 대화가 이뤄졌던 인셉션과 달리 스틸라이프가 지향하는 어떤 지점은 두 세계간의 구분이라는 관념을 무너뜨려야 가능하다. 여기에서 영화 속 세계와 현실은 상당히 모호해져있으며 현실과 영화의 관계는 평행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구분을 상실한다.

조금 다른 예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등장인물들을 계속 훔쳐보는데 그것은 관객들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카메라의 관음증을 스스로 충족시킨다. 관객들은 카메라의 관음증 속에 자신을 불편하게 내맡긴다.여기서 카메라는 일상이라는 소재와 대등한 존재가 아니라 관점을 투입시키고 재구성하고 왜곡시킨다. 이러한 시선과 태도를 달리하는 지아장커의 카메라는 소재들간의 내재적인 관계 그 자체이다. 이 영화를 중심으로 시선이 겨냥하고 모아지는 것은 일종의 공간성인데, 여기서 전면에 떠오르는 것은 등장인물이 속한 바로 그 공간(산샤)이 아니라 영화를 중심으로하는 시선들이 모아지는 바로 그런 공간이다. 이것을 가능케하는 것은 영화의 매체적 특성 그 자체인데 그곳에 등장인물과 관객 그리고 연출가의 의도 마저 수평적으로 위치지어진다. 그것은 바로 이 영화의 현재성이라는 즉물적인 테마의 중요성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의 그만큼의 즉물성이 동시대를 향한 하나의 평행적인시선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떠한 해석적인 시점이라도 축출시켜버리며 우리로 하여금 이제 그만 빠져나오도록, 이제 그만 결론지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영화는 각각의 시선들에 내부적인 관계성을 제공한다. 이것은 분명히 물리적인 만남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영화만이 가능하게 하는 전체성이다. 이곳에서는 분리된 각 세계들간의 전이 보다는 유일하고 단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세계라는 관념이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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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ldong park
recorded by me
video with iPhone 3GS / i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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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RODOT @Hive

2010.07.26 15:44 from 분류없음

acryl sheet _ 2009.09
photo by m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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